한성훈 : Symphony of the Universe

기간: 2021. 06. 16 ~ 07. 13

장소: 제주시 일주서로 7827-1, 2층

문의: 070-7795-5000


이룸갤러리 개관기념

한성훈 화백 초대전 | Han Seong Hun

Symphony of the Universe



한성훈 Profile 자세히보기




한성훈 화가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세계를 자신만의 기법인 

틱톡(Tic-Toc) 기법으로 표현해내며 전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틱톡(Tic-Toc) 기법은 심장의 고동소리와 시간의 순환, 

빛의 명암을 우주 공간에 표현해내며 전세계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Artist bio


1956년 한성훈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부산 지역에서 유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칼럼니스트이자 지역 신문의 공동 창립자였으며 한 의학 회사의 잡지를 만들었다. 그의 이웃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매우 영리하고 현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부산에서 가장 핫했던 광복동에서 자신만의 갤러리를 운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갤러리는 시장이나 국회의원들과 같은 정치인들의 아내들의 사교 모임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성훈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그는 중학교 여름방학 때마다 그의 삼촌인 김소운 시인의 집에 시를 배우러 갔는데, 그의 삼촌은 이미 일본에서 잘 알려진 시인이었다. 한성훈은 그곳에서 미국과 일본의 유명한 외국 예술가들을 볼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창조적이고 진보된 현대 미술을 보고 가슴이 뛰었고, 그것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당시 12세의 화가로서, 그는 그의 그림들 중 두 점을 공인된 장소에서 공인된 가격에 팔았다. 그의 그림은 자연적으로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표현해내는 현대 미술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미래의 예술가 한성훈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한성훈의 학교에 새로운 미술 선생님이 부임했는데 예술적으로 뛰어난 학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 전 미술 교사였던 우재만은 새로 부임한 미술 선생님에게 한성훈의 재능은 미래의 피카소가 될 수 있고 새로운 선생님보다 훨씬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 온 교사는 성질이 급해서 어린 학생에게 질투가 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새 미술교사는 부임 첫날부터 미술교실에서 한성훈이 어른의 페인팅을 흉내내는 모습을 보고는 ‘학생은 학생식으로 기본적 관행을 따라야 한다’ 며 그를 때렸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한성훈은 너무 굴욕적이고 충격적이고 화가 나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페인트와 붓을 모두 버렸다. 그 이후로 그는 2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다 17세 때 10년 동안 한성훈의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했던 집사는 전문 사기꾼들과 공모해 그의 가족으로부터 건물 3채와 넓은 땅을 불법으로 빼앗았다. 이 사기극으로 부모가 입원해야 했고 7남매를 둔 한성훈은 거리로 내몰렸다. 그는 그의 형제자매들을 학교에 보내고 부모님의 병원비를 지불하는 등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서명 없이 다른 예술가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화, 디자인, 카드, 삽화, 카탈로그 등 그의 손길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는 최고의 얼굴없는 가수 같았다. 그의 제품은 (이 경우 우리는 그것을 예술품이 아닌 상품이라고 부른다)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 덕분에, 그는 모든 형제들에게 좋은 교육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가족의 경제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성훈은, 한국을 방문해 한성훈의 아트쇼를 보게 된 한 미국인에게 친절과 배려심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다. 한성훈의 그림을 본 미국인은 한 씨가 예술적 재능이 있고 또 다른 피카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한성훈의 재능을 더 큰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뉴욕에서 한성훈의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는 유명한 플루트 연주자 줄리어스 베이커였는데, 그는 20세기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과 함께 음악의 대가 중 한 명이었다.


한성훈은 1996년에 뉴욕에 왔다. 줄리어스 베이커는 그를 가까운 아들처럼 대했다. 베이커의 뉴욕 예술계 소개 덕분에, 한성훈은 많은 컬렉터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성훈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 동안 뉴욕 최고의 아티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그가 뉴욕 예술계에서 5년 이상 더 머물렀다면, 그는 또 다른 피카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한성훈은 어릴 적 자신을 때렸던 미술 선생님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 비엔날레에서 1등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절망적인 좌절과 모욕이 그에게 닥친 순간, 한성훈은 이 예술계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 근처의 산에 은거하기로 결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술 선생님을 뛰어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시그니처를 만들기 위해 2년 동안 미술에 전념했다.

 

2001년, 한성훈은 예술계로 돌아오려고 했다. 한성훈은 황창배 화백으로부터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황창배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한성훈을 보고 싶어했다. 황창배는 20대 초반 전국미술제에서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1등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는 모든 한국 작가들의 바람이었고, 그는 한국 미술계에서 큰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국민일보에 실린 한성훈의 그림과 기사를 보고는 마지막 사인으로 한성훈에게 붓을 다 주고 싶었다.

 

황창배는 한성훈의 예술 작품에 두 가지 의견을 말했다. 첫째: 이 화가가 일반 한국 화가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둘째: 10년 후, 이 예술가는 예술계 전반에 걸쳐 한국을 미술선진국으로 자리매김시킬 것이다.

 

줄리어스 베이커와 황창배의 이런 예측은 맞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한성훈은 전 세계에 한국의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재위 60주년 국제미술제 위원장 폴 휴이트는 "한성훈이 런던 시민들에게 한국 작가들의 위상을 최대 30년 앞당긴다"고 말했다.


- 한성훈의 일대기는 박태병 화백 (여주 여성생활사박물관 관장) 씀